• 매일경제
  • mbn
  • 매경TV
  • 매경이코노미
  • luxmen
  • citylife
  • M-print
  • rayM
뉴스  ·  증권  ·  부동산  ·  비즈&  ·  교육  ·  스타투데이  · 
11월 19일 (일) MK thebiztimes
전체기사주별보기
경제용어 웹검색
Cover Story 바로가기 View&Outlook Case Study 바로가기 Trend 바로가기 Insight 바로가기 Human in Biz 미니칼럼 바로가기 Edu Club 바로가기

allview HOME > 쟾泥닿린궗
프린트 이메일 전송 리스트
[Human in Biz] 가을밤 어울리는 음악과 와인과 詩
기사입력 2017.11.10 04:02:04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대한민국은 위대하고 한민족은 대단하다. 한강의 기적이나 촛불 민주화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우리는 시와 음악과 와인을 향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고 대단하다.

지난 3월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 총 도서구매액은 한 가구당 평균 1만5000원이다. 한 달에 단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나라에서 믿기 어렵겠지만 500번째 시집이 나왔다. 1978년 1호 시집이 나온 이래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이 근 40년 만에 500호 특집 시인선을 출간했다.

여기저기 `스마트폰 좀비`들이 가득하지만 타국에서도 보기 드문 소중한 시의 탑을 쌓아올려 왔다. 시는 `시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던 것, 들을 수 없던 것, 만지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준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는 황동규부터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라는 황지우를 거쳐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에 가야` 하는 유하까지 젊은 날 그 시절의 감흥이 500번째 특집호에 다시 모였다. `사랑을 잃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 채 빈집에 갇힌` 기형도는 전설이 됐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고 알려주던 마종기는 어느덧 `마흔 두 개의 초록`으로 다시 왔고,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던 최승자는 여전히 `빈 배처럼 텅 비어` 있다. 교과서에 실린 시를 두고 얼토당토않은 문제를 내는 나라에서 시인선 500호라는 작은 기적을 이뤘다.

음반으로서의 음악을 지키는 곳은 풍월당이다. 압구정로데오 거리 한구석에 숨겨진 풍월당은 2003년 문을 연 뒤 15년이 된 고전음악 음반 매장이다. 공짜 음원이 넘치는 이 시대에 고전음악 CD와 LP 전문매장이 생명을 이어가는 기이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매장 안에 바흐부터 바그너까지 수천 장의 CD가 빼곡하고, 음악과 예술과 인생을 다룬 추천 도서가 널려 있어 풍월당을 처음 방문한 이들은 마치 유럽 어느 소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세계 어디서도 이런 규모로 클래식 음반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 사라졌다. 그래서 공연 차 방한한 연주자들이 종종 풍월당을 방문하면 아직도 이런 곳이 있냐면서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 풍월당 덕분에 폐반되었던 칼뵘 지휘의 브람스 교향곡이 되살아났고, 인기의 변방에 있던 다니엘라 데시의 아리아는 가슴 뛰는 아우라가 되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인문학 강좌도 방문객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으니 `풍월`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늘에 바람과 구름이 있기에 달이 더욱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끝은 와인이다. 이젠 허영의 거품이 꺼진 와인이 어색하지 않은 취향이 된 것은 와인 동호회의 영향이 크다. 사실 우리만큼 와인 마시기 어려운 곳도 없다. 와인 수입회사는 직접 와인을 판매할 수 없어 수수료를 떼고 중간도매상으로 보낸다. 백화점과 대형 유통업체를 거쳐 관세 15%, 주세 30%, 교육세 10%, 부가가치세 10%의 의무까지 다하고 나면 잘 팔리는 아이템만 족집게처럼 골라야 한다. 불행히도 해외에서는 먼 타국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와인을 수입하려면 잘 안 팔리는 와인까지 가져가라고 하니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 올 들어 건실했던 와인수입사 2곳의 경영권이 매각되거나 회생절차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수순. 와인에 비우호적인 한국에서 와인동호회의 노력은 눈물겹다.
오래 기간 보관한 단 한 병의 와인을 8명이 조금씩 나눠 마시거나, 블라인드 시음으로 지식을 서로 확인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경험치를 높이고자 애쓴다. 정당한 콜키지 비용을 지불하고도 와인 잔에 남아 있는 비린내에 항의 한 번 못하는 억울함도 비일비재하지만 제한된 시음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와인을 즐기는 첩경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모임 자리에서일 것이다.

가을밤에 어울리는 반더러 트리오의 브람스 피아노 삼중주와 한강의 시집, 감초 향과 연기와 흙 내음이 잘 어우러진 엘리오 알타레의 바롤로를 나누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아마 그곳이 천국일 것이다.

[장지호 한국외국어대 행정학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제용어사전 프린트 이메일 전송 리스트
관련기사

빈칸
PDF 보기